2017105일 목요일, 흐리다 밤에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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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기 딱 좋은 날이다, 해도 안 나고 덥지도 않고. 실컷 놀았으니 일 좀 해야겠다는 의욕도 있다. 나는 우선 대추를 따야겠다고 우산과 작대기를 들고 식당채 지붕에 올라갔다. 대추는 약간 파랄 때 따는데 농익은 대추는 이미 벌레가 생겼고 달고 잘생긴 대추는 새가 입질을 했다. 휴천재에 두 그루 대추나무가 있는데 한 그루는 앞쪽 장독대 옆에, 또 한 그루는 식당채 뒤에 있다. 뒤에 있는 나무의 대추가 훨씬 크고 달아서 딱딱할 땐 과일로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올해는 두 나무 대추가 나를 기다리다 지쳐 다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떨어진 것이 어디 대추뿐이랴? 보스코가 너무 실망할까 봐 새벽녘에 잠옷 바람으로 배 밭에 가 보니, 배가 모조리 떨어져 버리고 나무에 붙어 있는 봉지도 만져보면 지레 말라버렸거나 하고 물이 쏟아지게 곯아 있었다. 초봄에 가지치기하고 세 번이나 소독을 하고 배를 솎아 봉지까지 싼 보스코는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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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우산을 거꾸로 펴고 살살 대추를 털어내는 대추수확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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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유가 정당해야 이런 황당한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남원 최요한 선생에게 우리 배와 같은 올배 원앙에 대해 작황을 물어보니 작년보다는 잘 되었단다! 그렇다면 우리 건 왜 이러냐고 물으니 주인이 없어 심술을 부린 것 같다고 한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어 운림원 강영숙씨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수확이 늦어서란다


자기네도 남편이 아픈 뒤 배농사를 포기했는데 혼자 꽃 피고 열리고 익어 8월 말까지는 잘 매달려 있더니만 9월도 중순이 지나자 죄다 떨어져 버리더란다. 좀 덜 익었을 때 따야 보관이 된다고, 내년에는 8월 말이나 9월초에 따서 자가숙성을 시키란다. 아까는 저 서른 그루 배나무를 싹 베어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무들도 으스스 몸을 떨다 이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겠지. 그렇지만 성한 배가 단 한 개도 안 남다니!


2017년도 보스코의 30그루 배농사 수확전부! (그를 해고할까? 배나무를 베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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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대추농사도 망했다 (집을 비우지 말까? 내가 사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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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서 보스코는 아래 텃밭에서 예초기를 돌리고, 나는 낫으로 화단의 꽃들을 심하게 괴롭히는 넝쿨들과 잡초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꽃이 진 화초들을 뽑아냈다, 해거름까지. 보스코는 풀이 키만큼 자란 땅에 우선 길을 내고, 창고 앞까지 진출한 풀들은 우선 베어 넘겼다. 저것들이 마른다음 긁어내고 다시 한 번 예초기를 돌려야 할 게다. 예초기를 돌리다 날을 갈아야 하는데 무작정 나사를 돌리다 날을 못 갈고 쩔쩔 매기에 내가 무작정 들고서 마을로 내려갔다. 다행히 가밀라 아줌마 작은아들이 손쉽게 날을 바꿔져서 보스코한테 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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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풀 중에 특히 덩굴식물을 싫어한다. 누구를 칭칭 감는 건 목을 조이는 일이다. 환삼덩굴, 사위질빵, 박주가리, 새콩 쥐방울, 나팔꽃까지... 그 많은 덩쿨이 화단 꽃과 나무들에 온갖 행패를 부린다. 주인이 없다는 걸 저것들이 더 잘 안다. 그 중에 도깨비바늘, 도둑놈의 갈고리, 독고마리 등은 온 몸에 붙어와서 집안까지 따라와 사람을 협박한다.


그 식물들이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하고 동물이나 사람 몸에 붙어 멀리 퍼지는 이동수단이기도 하다. 이렇게 산속에 살면 예쁜 화초들만 보는 게 아니고 이런 불편한 식물들을 봐야 하는 건, 인간 사이에 살면서 싫은 사람 꼴도 어쩔 수 없이 봐야 하는 이치와 같다.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천상병) 그렇게 우는 건 새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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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저 풀들도 거저 살지 않는다. 사람은 잡초라고 부르지만 땅을 비옥하게 해주고, 환삼덩굴이나 사위질빵은 벌치는 사람들이 밀원(蜜源)으로 선호하여 이기자는 벌들의 식당이라고 부른다. 오늘도 저것들을 걷어내며 올 여름 너희가 많은 벌을 먹여 살렸겠구나칭찬도 해줬다.


동네 아짐들이 산에서 다람쥐처럼 주워모아서 만든 도토리묵을 주셔서 저녁에는 묵국수를 해먹었다. 늦가을다운 메뉴다. 이렇게 간소하게 먹다보면 이탈리아 파스타로 불려온 보스코의 배도 어느 날엔가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모처럼의 밭일에 너무 힘들었는지 그는 9시도 안 되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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