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825일 금요일, 맑음


밤이면 보스코는 글을 쓰고 시우는 내 침대에서 뒹굴며 옛날이야기를 듣는다. 걔는 형에 대한 의존도가 커서 사이좋은 형제의 탐험 얘기를 꾸며서 들려주면 긴장을 하고 두 주먹을 꼭 쥐고 열심히 듣는다. 그러다 슬픈 대목이 나오면 눈물을 글썽이며 "함무이, 형 나쁘게 되지 않게 해 주세요." 라는 주문을 한다. 물론 내가 해주는 얘기는 모두 해피엔드고 고객의 주문을 충실히 따른다. 또 제일 스릴 있고 재밌는 순간 "다음호에 계속"을 남긴다.


"함무이, 내일도 또 해주실 꺼죠?” “, 해주고 말고.” “그런데요 모레면 우리가 제네바로 가니까 얘기를 책으로 써주세요. 함무이가 서울에 가셔도 읽고 또 읽게요." 내가 하는 얘기는 그동안 내가 읽고 듣고 생각한 이야기를 짜깁기해서 걔가 좋아할 줄거리로 꾸민 것이니 내 책이 나오면 당장 표절로 찍힐 게다. 그렇더라도 내 유일한 작은손주에게 금세기의 유명한 동화작가로 인정받는 일은 참 흐뭇하다. 예전에 내 턱 밑에서 동화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던 빵기 빵고가 다시 내 곁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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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가 그렇게 열심한 신자인 줄 미처 몰랐다. “성당이 놀이동산인 줄 아니? 왜 그렇게 성당엘 가려고 해?” 물으니 성당이 재미있단다. 삼촌이 미사 드리는 것도 멋지고, 끝나고 할머니들이 자기한테 과자를 싸다주시는 것도 좋고, 특히 영성체 때에 삼촌이 자기 머리에 축복해 주는 게 제일 좋단다. 나도 소베로니카 할머니와 고비오 할아버지를 위한 미사를 부탁하며 작은아들이 사제여서 참 좋구나 싶다


부모에게 떨어져 며칠 삼촌신부님 옆 침대에서 자기 때문에도 저녁이면 저녁기도를 삼촌과 함께 바치고, 함무이 하부이에게 와서 밤인사 뽀뽀를 하고 가서 잠든다. 아침에도 눈을 비비며 찾아와 안녕히 주무셨어요?’ 작은손주 인사를 받을 적마다 우리 둘에게는 이 열흘이 꿈같은 밀월이다.


보스코는 이재용판결이 걱정되어 새벽잠을 설치고 책상에 앉아 아우구스티누스와 씨름했나보다. 여전히 유전무죄(有錢無罪)’식의 형량에 정말 속이 상했지만(‘이건희 성매매 동영상을 공개했다는 사람에게는 그것만으로 징역 46개월이 선고되었다!) 적어도 박근혜에게 형량을 안길 죄목들이 유죄판결을 받은 사실로만 우선 만족하기로 했다.


오늘은 시우에게 내가 읽은 잡지에 실린 일화. 2차대전 전장에서 독일군이 연합군을 보고 총뿌리를 겨눈 순간, 무방비상태의 연합군이 깜짝 놀라 막 먹으려던 빵조각을 적군에게 내밀었고 허기진 독일군은 그 빵을 받아먹으면서 연합군을 살려줬다는 얘기를 들려주고서, ‘상호성의 원리라고 종이에 적어주었다. 어제는 오후 내내 뜻모를 황금률’ ‘황금률을 중얼거리더니 오늘은 상호성의 원리’ ‘상호성의 원리를 중얼거리며 삼촌방에서 레고를 조립하고 있다.


빵고신부의 서울대신학교 동기 백신부가 가까운 동네 노바테 밀라네제에 와 있어 오늘 점심에 초대했다. 한국에서 얼려서 가져온 순대국, 순대, 잡채, 근대나물, 김치, 물외짱아찌, 멸치볶음으로 상을 차렸다. 아들 덕분에 심심할 겨를이 없다. 백신부는 자기가 모시는 노인 사제에게 방학을 마치고 떠나기 전에 한식을 대접하고 싶은데 대책이 안 선단다. 빵기네가 오늘 저녁에 오니까 차려주려고 넉넉히 했던 잡채를 싸 보냈다. 함무이 나름의 상호성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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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쯤 빵기 부부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도착했다. 2시 반부터 창가에 고개를 얹고 애타게 기다리던 시우가 지쳐 쓰러질듯한 시각 드디어 엄마를 끌어안고 비벼대는 모습은 ‘50년만의 이산가족 상봉그 이상이다. 밥 먹을 때도 산보 길에도 어찌나 어리광인지 어이구, 우리 쁘띠베베라고 놀렸다. 밤엔 그동안 그리웠던 엄마품을 따라 호텔로 가려니 했던 시우. “우리 없이 엄마 아빠 편하게 주무세요."란다. "어라, 쟤가 웬일?" 했더니만,엄마가 떠나자. 함무이 우리 게임 하자요." 엄마 품을 마다하고 속셈을 따로 챙길만큼아아, 시아는 물론 시우도 훌쩍 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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