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623일 금요일, 맑음


어제 집에 돌아오니 자정이 다 됐다. 정원은 머리를 산발한 채 감지도 않고 냄새를 풍풍 풍기는 밉상의 떠꺼머리총각 같았다. 루드베키야는 돌봐주는 이 없이 되는 대로 놓아먹인 야성의 숨결을 뽐내고, 파슬리는 키 재기라도 하듯이 멀쭉한 키에 헤벌쭉한 웃음을 흘리고, 뿌리가 약한 꽃들은 긴 가뭄에 지쳐 축 늘어져 있다. ‘버려진 뜰의 자유로움!잡초들에게 삶의 전권을 준 흔적이 역력하다무엇보다 급한 건 물! 가방을 던져 놓고 호스를 풀어 30분은 넘게 골고루 물을 먹여줬다. 꿀꺽꿀꺽 풀들이 맛나게 물 들이키는 소리가 들린다, 꽃을 사랑하는 이들의 귀에는


그 시각에 인천에서 달려와 우이동에 나를 내려주고 아직 성남까지 가야 했던 엄엘리는 1230분에 도착했다니... 참 많이도 피곤하겠다. 그래도 늘 밝은 미소로 사람을 맞는 그니가 보고파 서울 와서 시간만 나면 그니를 찾게 된다. 이엘리도 내가 부르기만 하면 시간을 쪼개 인천서 달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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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송도 모니카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휴가기간이어서 우리 세 여자가 맘 편히 찾아갈 수 있었다. 무더운 저녁이어서 그니는 프로슈토 크루도(숙성시킨 돼지 앞다리 고기를 종이처럼 얇게 썬 햄)와 루콜라, 멜로네, 모짜렐라와 호밀빵으로 가벼운 메인 요리를 마련했고, 야채 수프로 저녁을 마감했다. 거기다 맛있는 포도주와 과일, 후식으로는 엄엘리가 마련해온 마카롱과 에스프레쏘가 있어 참 멋진 저녁이었다.


모니카가 가정식 레스토랑 '디모니카'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개성 있고 값진 얘기를 듣노라니, 그니는 음식만 하는 게 아니라 생명을 나누는 사목을 하고 있다. 그니에게서 쿡 코스를 배우는 이들과는 치유의 여정을 함께 걷는 듯하다. 그니의 요리의 핵심: 쉽게 구할 수 있는 가장 소박하고 평범한 음식에, 극히 단순한 향신료를 써서, ‘정성이라는 손길로 변화시켜, ‘행복으로 살려내는 기적! 그런 기적을 매일매일 일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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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집에 자면서도 밤새 마당의 풀 뽑을 생각으로 머리가 무거웠던가 보다. 2시쯤 잠들었는데 5시에 벌떡 일어났다. 계절은 하지여서 세상이 훤하다. 바늘에 실을 꿸 일도 없고 잡초와 꽃만 구분할 수 있으면 된다. 왜바지에 남방, 모기가 어지간히 많아 온몸에 모기퇴치제를 뿌리고, 오리궁둥이를 차고 낫을 들고 나섰다. 지리산에서도 우이동에서도 원더우먼의 복장은 똑같다. 지리산과 서울의 잡초가 똑 같듯, 그 중에도 제일 징그러운 것은 바랭이와 질경이. 캐도캐도 끝이 없다.


11시에 강남성모병원에서 대모님을 만나기로 해서 가방을 챙긴다. 지리산 집에 보스코의 여름양복이 없어 3층에 올라가 양복 두 벌을 찾아 케리어에 넣고서 골목길로 끌고 나섰다. 버스로 혼자 올라와서 일만 실컷하다 나서는 골목길. 누가 더 남아있으라고 붙잡지도 않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없으니 40년간 정겹던 골목길도 어쩐지 낯이 설다.


11시 서울성모병원이란 어마어마한 성채에서 대모님을 만나고, 언젠가 수녀님께 자기 집을 내주어 수녀님들을 쉬게 해주었다는 황안젤라씨도 만났다. 우리 대모님이 올해로 수녀 되신지 50주년, ‘금경축이어서 축하 인사를 드리러 간 길이다. 빵고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우리집에 오셨다가 막 목욕을 끝낸 빵고를 안아주셨더니만 기분 좋게 수녀님 옷에다 쉬야를 했단다. 걔 나이가 올해 마흔이니 40년 전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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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분 버스표를 샀지만 일이 일찍 끝나 320분 버스를 타려는데 지하철 강변역에 내려 시계를 보니 남은 시간 3! 아무리 뛰어도 5분은 걸릴 참이라 터미널 뒷문으로 직행했다. 터미날에서 한길로 막 나오는 함양행 버스 앞을 막아서면서 인사를 꾸벅했다. 상황을 알아챈 아저씨가 버스문을 열어주면서 한 마디. "담엔 길에서 타면 안돼요!"


이대의 정유라에게만 뒷문 특혜가 있는 게 아니고 고속버스터미널에도 뒷문 특혜가 있다니.... 최순실과 이대교수들은 오늘 유죄판결을 받았다지만 역시 특혜는 받고 보니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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