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620일 화요일, 흐림


해질녁에 테라스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보스코와 함께 저녁기도를 시작하려는데 후두둑 빗방울이 진다. 한 방울이라도 얼마나 귀한지 손바닥에 내린 빗방울에 가만히 혀를 대본다. 달다. 성무일도를 덮고 돌아서며 먼 하늘을 본다. 지리산 위로 커다란 돌고래 모양의 검은 구름이 바람이 불자 꼬리를 치며 튀어 오른다.


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나에게 젖을 물리고 산그늘을 바라본다

가도 가도 그곳인데 나는 냇물처럼 멀리 왔다

해 지고 어두우면 큰 소리로 부르던 나의 노래들

나는 늘 다른 세상으로 가고자 했으나

닿을 수 없는 내 안의 어느 곳에서 기러기처럼 살았다

살다가 외로우면 산그늘을 바라보았다 (이상국 산그늘”)


크기변환_IMG_8219.JPG


여동문회 아우들이 서울에 가기 전에, 함양의 명소 상림을 한 번 더 보여주고 싶어 상림 주차장으로 오라고 했다. 간밤에 오랜만에 만난 터라 오늘 새벽4시까지 얘기를 나누었다는 유목사는 운전하다가 졸까봐 벤치에서 쉬겠다며 남고, 우리 여섯은 공원길을 걸었다. 공원 중간으로 맑은 물이 물결쳐 흐르고 흐르는 물에 섞여 우렁이들이 게으른 걸음을 옮긴다. 작년에 와서는 연꽃을 못봐 아쉬웠는데 성질 급한 연꽃이 마구 피어나 아우들은 탄성을 올렸다. 날씨가 갑자기 더워져 눈도 귀도 없는 꽃이지만 이 더위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이 정도 서비스는 해야겠다는 생각들을 한 듯하다.


크기변환_IMG_8173.JPG


크기변환_20170620_145254.jpg


크기변환_1498001175687.jpg


뒷마을 이른 봄에 들양귀가 만발했던 터에는 키 작은 여름 코스모스와 노랑코스모스가 급자기 찾아온 더위에 빨리 꽃을 피우고는 씨방을 마련하고 있었다. 역시 꽃은 여인들을 위해 있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윤인선은 셀카봉을 휘두르며 열심히 사진을 찍고, 서애란은 이렇게 잘 마련된 숲은 드물다고 칭찬을 하는데 입장료도 안 받는 일을 두고는 모두가 함양군 인심을 칭찬한다.


오가던 길에 우리가 함께 지낸 한신대의 추억을 나누고 주변의 자잘한 옛이야기까지 하다 보면 하찮은 일들도 이렇게 재미있어 모두 젊은 시절 소녀들로 돌아갔다. 산책이 끝나고 콩꼬물에서 눈꽃빙수도 먹었다. 정말 언어는 여인들을 위해 하느님이 창조하신 가장 큰 선물이다.


크기변환_IMG_8150.JPG


크기변환_20170620_151727_001.jpg 


크기변환_IMG_8148.JPG


노인들과 함께 사는 인선이는 죽음에 대해서 아주 긍정적이어서, 심장마비로 죽은 이들이 축복받았다고, ‘죽을 복 타고 났다고 설명한다. 예전에야 환갑을 겨우 넘기는 사람도 손꼽을 정도였지만 지금은 90, 100세를 후딱 넘기다 보니 누가 죽기라도 하면 옆에서 진심으로 부러워한단다


어떤 노인은 아들이 죽자 그렇게 서러워하기에 며느리와 시어머니 둘 중에 누가 더 서러울까를 헤아렸다면서, 젊어 남편을 잃은 며느리, 자식을 묻은 어머니 어느 편일까 나더러 물었다. 나 역시 대답을 못 찾겠다


크기변환_IMG_8186.JPG


크기변환_20170620_150501.jpg


크기변환_20170620_150825_001.jpg


그들이 떠나며 집으로 돌아가는 나에게 성애가 하던 말. “가서 성교수님 저녁 차려드려야겠네. 남편이 없으니 그 점에서는 해방이야.” 하지만 작별인사를 하면서 그니를 가만히 안아보니 앙상한 그니의 어깨가 혼자라는 게 얼마나 힘든가 소리 없는 흐느낌을 들려준다.


여자는 위타적(爲他的존재'여서 누군가를 위해 살면서 자기 존재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는 생물임을 실감하겠는데, 혼자 있으니 저녁 챙겨 줘야 할 사람도 없고, 자신도 저녁을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편하다는 말에 나는 속으로 "다섯 끼를 먹어도 내 곁에 보스코가 있는 게 좋다"에 한 표 던진다


내 나이만큼 늙어서도 이렇게 의타적(依他的존재’가 되고 나면 국염씨는 "여성학 가르쳤더니 말짱 '꽝'이다." 하겠지? 하지만 의타적 존재 아닌 생명체가 지상 어디에 있겠으며, 의타적이다 보면 위타적이 아닐 사람이 세상에 있겠는가? 


                크기변환_20170620_151326.jpg  


그래도 초저녁에 비가 5mm 쯤 왔다. 벼논에 개구리소리가 유난히 크다. 젖은 등을 물밖으로 내밀고 암캐구리를 기다리는 수캐구리의 간절한 노랫소리가 '그래도 살아 있는 게 아름답다'는 아우성으로 들린다. 


크기변환_IMG_8179.JPG


크기변환_IMG_8181.JPG


크기변환_IMG_8205.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