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213일 토요일,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그 봄비”,박용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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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휴천강변 샛길을 걸었다. 잠시 비가 멈춰 우산도 없이 나섰는데 챙 없는 털모자를 쓴 내뺨위로 해살질하는 사내애처럼 한두방울 끊이지 않고 뿌려댄다. 보스코는 앞챙이 있는 모자여서 못 느끼는지 말없이 앞서 걷는다.


모레 왜관에서 새로 나온 '삼위일체론'을 두고 출판사와  얘기할 게 있어 하루 종일 그 두꺼운 책을 들여다보느라 동창 송현씨의 상가도 못 올라간 처지여서 산봇길 걸리러 데리고 나오는데도 눈치를 봐야 했다. 비가 오는 것 같아. 우산 가져갈까?”라는 말을 꺼내려다 행여 "그만 들어가자."라는 말이 나올까 아뭇 소리 못하고 따라나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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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종일 비가내려선지 칠선계곡, 백무동계곡, 뱀사골계곡의 물이 인월의 물길과 합쳐 제법 많은 물이 휴천강을 소리내 흐르고 있다. 강은 오랜만에 강가의 바위들을 깨끗이 씻어내리고 돌팍 사이로는 재잘거리며 흘러내린다.


강씨네 날림집을 지나서 웰니스펜션앞까지 갔다. 도랑물이 불어 신발을 신은채로는 건널 수 없어 펜션집 주인이라도 있으면 인사라도 나누고 차라도 한 잔 얻어마실까 울라가 보았더니 쇠줄을 앞마당에 늘여놓아 출타중임을 표했다. 


오래오래 뒤지터에서 도인처럼 혼자 살아오다 산행 온 어느 올드미스와 사랑에 빠져 그만 결혼을 하고 말았단다. 그래서 인기척 있는 거리로 내려와 휴천강이 내려다보이는 조용한 곳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알콩달콩 살면서 민박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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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밤길 산보를 하다 부인이 그만 언덕 밑으로 굴러떨어져 목뼈가 부러졌는데 기적처럼 신경이 끊어지지 않아 전신마비를 피할 수 있었단다. 몇 달 입원했다 재활치료를 받는 소문을 동네에서 들은 터였다. 아내가 진주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도인에서 속세로 돌아온 그 남자의 정성스런 간호와 애틋한 사랑이 동네 할메들의 입도마에 올라 사람마다 한 마디씩 그 위에 고명을 얹었다.


그집 마당 한켠에놓인 돌절구에 봄비가 동그라미를 떼지어 그리기 시작하자 보스코가 서두른다. 여보, 비온다 빨리가자!” “비 좀 맞으면 어때? 백연마을로 올라가 물레방아 앞에 새로 지은 집 구경하고 가자!” “싫어.” “?” “다리 아파.” “그럼 돼지막으로 올라가 신선생 연못집 앞으로 돌아서 가자.” “싫어, 비오 잖아? 다음에 갈 게.” “담에 가기로 약속했어?! 그럼 봐주지.” (내심으로 당장 내일 그 길을 걸릴 작정이다.)


빗살이 심해져 문정식당(이미 문 받은지 10여년 되는 까마득한 옛날의 간판) 처마밑 평상에 앉아서 비가 뜸하기를 기다리는데 우리의 도란거리는 소리에 자리보전하고 있었을 주인이 얼굴을 내민다. 수술과 치병으로 고생하는 분이다.


이 마을 몇 안 되는 남정들 가운데 이장님, 나와 갑장인 기동씨를 빼놓으면 보스코를 비롯한 일곱명은 다들  70대고, 부면장님도 현대양반도 옥규씨도 병상에 들었다. 오늘도 마을회관 점심상에 남자라곤 자기 혼자였다는 유영감님의 탄식을 들은 터였다. “아무갠 서울 무슨 병원에 가 있고, 아무갠 부산에 입원해 있고, 아무갠 집밖에 나온지가 몇 달이고, 아무갠 이젠 산송장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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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거니 뒷서거니 한 분씩 세상을 등지고 가서 앞산에 등대고 눕는 행렬이 시작한지 꽤 오래다. 요 몇년 사이에 조합장님, 마르타아줌마네 이영감, 신국이 아제, 노인회 회장님이 차례로 앞산으로 가서 이불을 봉긋이 덮고서 긴 잠에 들었다. 남은 아낙들이야 숫자로 남정들의 두 배나 되지만 오랫동안 남편 병수발 하다보면 안방에 누웠으나 양지녁에 누웠으나 매한가지”라면서 생사를 초탈하게 된다.


식당집에서 우산을 빌려 둘이 쓰고 올라오면서 봄비에 봉오리가 터지는 매화를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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