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쟁이 목자 
 
"목자가 아닌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양들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러면 이리가 양들을 물어 가며 흩어지게 합니다." (요한 10,11-18) 
 
이 백주년 성서는 오늘의 복음을 전보다 훨씬 멋있게 번역하였다. "나는 어진 목자(ho poimen ho kalos)입니다." 그리스인은 '좋다'는 말 한 마디로 부족한지 반드시 "아름답고 선한"(kalos k'agathos)이라는 두 마디로 표현했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목자는 웬일인지 '선한'(agathos) 목자가 아니라 '아름다운'(kalos) 목자이다. 쉽게 말해서 '멋진' 목자이다.

 

사람은 양을 잡아 고기는 먹고 가죽은 통째로 뒤집어 무스탕을 만들고 털로 옷을 짜입는다. 삯꾼이라면 당연히 기왕이면 토실토실 살찐 양이나 포동포동 맵시나는 암양에게 관심이 간다. 그러나 멋쟁이 목자는 여위고 비루먹어 물통 앞에서도 제 차례를 얻지 못하는 양과 새끼 양에게 각별한 보살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양들은 삯꾼과 멋쟁이 목자를 잘도 구분해 낸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내 목숨을 내놓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은 사람을 목장 주인은 어떻게 취급할까? 목숨을 버리는 일을 차치하더라도, 지금처럼 경영 합리화의 시대에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버려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다고 자리를 비웠다가는 목장 주인한테 당장 해고통지를 받는다. 그래도 멋쟁이 목자는 잃은 양 한 마리, 사회와 교회로부터 버림받은 자들게 자꾸 마음을 쓴다.

 

그러나 멋쟁이 목자라면 동료 성직자나 장상에게 어지간히 구박을 받더라도 "인자는 정해진 대로 갑니다(going my way). 그러나 불행하구나, 그를 넘겨주는 그 사람!"(루가 22,22)이라며 벽지로, 감옥으로 떠난다. 동료 사제 중 누가 떠났다고 해서 베드로처럼 "유다는 사도직을 버리고 제 갈 곳으로 갔습니다(going his own way)"(사도 1,25)라고 비아냥거리지도 않는다

 

멋쟁이 목자는 수천 명이 넘는 본당 신도에게 말씀을 펴고 성사를 베푸는데 여념이 없다. 본당에서 사제 권위가 돈주머니에 있다고, 결재하는 도장에 있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그는 목자이지 경리사원이 아니다. 또 멋진 목자는 사람을 치는 목자이지 건물을 부수고 짓는 집장사가 아니다.

 

멋쟁이 목자는 목자의 직분에 약간의 영웅심이 필요함을 안다. 늑대가 올 때 도망갈 사람이 아니라는 보증을 세운다. 그래서 자신을 비우고, 인생의 가장 고귀한 사랑과 행복을 포기한다. 사내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섹스가 상품으로 깔려 있고 모든 것이 섹스로 영상화되는 세계에서 그는 고독하게 독신으로 살며 하늘을 가리켜 보인다. 비록 그 영웅성 때문이라도 독신은 교회법의 제도로 강요하기보다는 자유로이 선택하고 결단하는 일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부제 서품의 서약에 충실하다.

 

그래 우리 주님은 정말 멋있는 분이셨다. "어진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습니다." 그분 자기 목숨을 내놓고서는 어떤 인연으로든 당신한테 가까이 오는 사람에게 마술을 씌우신다. 그 사람도 당신처럼 목자로 나서게 충동하시고, 기왕이면 당신처럼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게 꾀시고, 기어이 이리떼 습격에 말려들게 만드시고, 목숨을 내놓을 용기를 주신다. 그래서 온 세계 언덕마다 십자가들이 세워져 있고, 이 목자에게 삶과 죽음의 영감을 받은 자가 도살장처럼 쇠갈쿠리에 줄줄이 매달려 있다.

"이러한 명령을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서 받았습니다"(10,18).
(1994. 4.24: ㉯ 부활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