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성사에 녹아 있는 사회교리)

                                         [가톨릭마산 2015.11.15]


사제, ‘하느님의 사람(신품성사 )


교회에서 봉직하는 사제들에게 붙여지는 가장 멋진 호칭은 하느님의 사람일 게다. 바오로 사도가 제자 티모테오에게 붙인 이름이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1 티모 6,11)


그럼 무엇이 한 젊은이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들까? 성당에 거주하면서, 오로지 교회와 하느님을 바라고 독신생활을 하는 신분일까? 주교님이 하느님 백성의 선임을 받아들여 안수하고 도유하여 신품성사를 주어서일까? 우리 본당을 사목하라는 교회의 위임을 받아서일까?


무슨 신통력을 지녔기에 사제가 제대에서 신자들의 염력을 합쳐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발설하면 하얀 면병이 그리스도의 성체로 변하고, 고백실에서 나도 교회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사합니다.”라고 염송하면 하느님 앞에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것일까?


성경을 검색해 보면 구약에 80회 나오는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단어 가운데 70회는 예언자를 가리키는 경칭으로 나온다. 예언자는 이것은 야훼의 말씀이다.”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발설하고 그 말에는 하느님 능력이 깃든다. 주교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안수와 서품은 사제에게 예언직을 수여하는 성사다.


예언자의 첫째가는 본분은 백성이 잡신이나 재물이나 권세를 하느님처럼 받드는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게 보살피는 일이다. 사회불의를 보면 국왕 면전에서 목숨을 걸고 소리 지른다. “이스라엘이 지은 죄, 그 쌓이고 쌓인 죄, 죄 없는 사람을 빚돈에 종으로 팔아넘기고, 힘없는 자의 머리를 땅에다 짓이기면서, 상아 침상에서 뒹굴고 양떼 가운데서 양 새끼를 골라 잡아먹는 짓”(아모스 2,6; 6,4)을 두고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비롯해 제 명에 죽은 예언자가 없다. 하나같이 권력자와 제도언론에 칼 맞아 죽었다.


오늘날에도 성당에서 사회정의를 야기하고 정치적 불의를 일깨우는 강론을 하는 사제가 있다면 하느님과 교회에서 받은 예언직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제들에게 속 시끄럽게 성당에서 그런 얘기하지 말라!”는 신자들이 있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이 나서서 어느 누구도 종교를 개인의 내밀한 영역으로 가두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종교가 사회적 국가적 삶에 영향을 끼치지 말고, 국가 제도의 안녕에 관심을 갖지 말며,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복음의 기쁨 183)고 두둔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