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새로운 지평에서

 

                                                                                                                [가대청년 1994.3.27]

 

엄마의 손에 이끌려 초등학교 교정을 처음 들어섰을 적의 흥분과 두려움을 기억하는 대학생이 있을까? 전화를 통해서나, 응시한 대학교 게시판에서 합격 사실을 알고 기분 좋았던 흥분이나 주변의 축하도, 입학식의 기분도 사라지고 요즘은 시간표에 따라서 강의실을 쫓아다니기 바쁘고 리포트 작성에다 중간고사 준비에다 여념이 없을 것이다.

 

대학생활은 여러분 인생에서 (아마도 유일하게) 피크닉처럼 밝은 세월이다. 그러니 달리지 말고 천천히 걸으라! 인생은 길이 길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도회지, 학교, 성당, 공장, 병원, 그리고 공동묘지를 지나간다. 여유 있게 음미하고 걷노라면 그대는 자갈밭에서도 값진 진리의 다이아몬드를, 한 송이 꽃에서 우주의 신비를, 어느 학우의 눈에서 그대의 사랑을 발견할 것이다. 젊음만으로도 그대들은 참으로 부유하다!

 

어쩌면 인생의 새로운 지평에 여러분은 서 있다. 우선, 대학생활은 처음으로 여러분이 사회에 눈뜨는 기회이다. 여태까지 텔레비전 뉴스에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는 장면이 잠깐씩 나오고 “공부하라고 대학 보냈더니 데모나 한다!”면서 어른들이 욕하던 바로 그 현실 한가운데에 와 있다. 요새는 여러분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거나 데모의 현장으로 끌고 나가는 움직임은 드물 것이다. 그런 운동에는 절대로 끼지 말라고 어머니한테서 신신당부도 받았을 것이다(성모 마리아가 외동아들은 울 엄마들처럼 요령 있게 키웠더라면 서른 셋 한창 나이에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꼬락서니는 없었을 텐데…)

 

그렇지만 대학생활은 우리가 민족의 현실과 가난한 민중들의 고난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군사정권과 그 사생아 정권의 허상과 비리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민주니 정의니 통일이니 하는 말이 얼마나 감미로운가를 처음으로 깨닫고 실감하는 기회이다. 인생의 메타노이아(회심)를 이룰 은총의 시간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여러분은 소위 “운동권”보다는 경찰의 망원을, 노조보다는 구사대를, 재야보다는 안기부원을 선택할 것이다. 또 여러분이 이를 가족은 추잡한 중산층, 체제에 붙어서 채독 걸린 민족의 내장에서 알짜 양분을 빨아먹는 기생충, 여러분 손아귀에 있는 것을 나누라고 말하는 자가 나타나면 그가 설령 예수라 할지라도 멱을 따려고 덤비는 실천적 무신론자가 될 것이다.

 

여러분이 전국 가톨릭 대학생 협의회에 참여한다면 아마도 여러분은 교회의 진면모를 처음으로 마주할 기회를 만날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투신과 민족적 민중적 해방의 누룩을 그 복음서에서 발견하기도 하겠지만, 기득권의 비호를 받으며 (평화의 이름으로)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을 편드는 보수반동의 교계 모습에 실망도 할지 모른다.

 

지지리 못난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이 한반도가 우리의 어머니이듯이, 아무리 흉하게 일그러졌을지라도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다. 교회를 멀리할 때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척박함 뿐이다. 설혹 우리가 마르크스와 주체사상에 심취하더라도 젊은이들이여, 주님은 그리스도이시고 그들은 주님의 사도로 머물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천주교 국가에서 천주교 장군들이 만든 학살부대에게 천주교 제단에서 미사드리다 총 맞아죽은 로메로 대주교의 말대로 “여러분이 교회다!” 여러분의 지금 삶이 교회 모습을 좌우한다. 교회와 더불어 세계를 느끼고(sentire cum Ecclesia), 교회를 대신하여 민족과 민중의 번뇌를 느끼라(sentire pro Ecclesia). 단지 한 가지 유념할 것은 신구약의 역사를 통틀어 하느님의 사람을 자처하는 예언자는 단 하나도 제 명에 죽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가대청연 1993. 3.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