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위의 명패

 

                                                                                             [가톨릭신문 (방주의 창) 1989.7.9]

 

반대 받는 표적

“이 아기는 많은 사람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성전에 안겨 온 아기 예수를 두고 시므온 노인이 한 예언이다.(루가 2, 34~35)

 

문익환 목사, 서경원 의원, 임수경 학생처럼 관변언론들이 일제히 성토하고 나서는 인물이 등장할 적마다 우리는 이상하게 각자의 숨은 생각을 폭로하고 만다. 혹자는 그들이 패가망신을 무릅쓰면서 이 나라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 가는 의인들이며 ‘하느님의 사람들’이라고 존경하고, 혹자는 빨갱이들이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그런데 진실을 알고자 힘쓰고 타인에 대한 애덕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자기가 하는 심판을 하느님이 엄정하게 판결하신다는 것을 알 만한 신앙인들마저 이 조류에 고스란히 휩쓸리는 모습을 보면 매우 안타깝다. 진실에 대한 외면, 통일에 대한 두려움, 정의니 자유니 인권이니 하는 말에 대한 까닭 없는 저항이 그런 언행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을 모독하였다는 설독죄로, 인류에게 십계명을 내리신 분이 안식일을 어겼다는 부도덕죄로, 왕 중의 왕이 유다인의 왕을 사칭하였다는 대역죄로 십자가에 처형당했음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권력자들이 정적들에게 죄목을 씌우는 십자가의 명패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우리는 반공주의자이기에 앞서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신문과 라디오에서 누구를 두고 ‘죽여라, 죽여라, 십자가에 매달아라!’는 함성이 들리면 소스라쳐 놀라면 무죄한 인간이 죽어 ‘그 피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쏟아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차마 사람이 되어 오시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므로 유다의 종교지도자들과 정치가들은 나사렛 사람을 서슴지 않고 못박아 죽였다. 우리 시대에 예수께서 남한 사회에 오신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오실까? 그분은 항상 인간들이 예상 못한 얼굴을 하고 오신다.

 

혹자는 실정법을 내세우지만 국가보안법이 반민주 악법이라는 것은 6공화국에 들어와 여·야가 인정한 바이고 그 개폐를 추진했었다. 악법은 그 도덕성을 상실한다. 우리 천주교 선열들은 천주학을 믿지 말라는 국왕의 교령을 어기고서 백여 년 동안 신앙을 고수하다 목숨을 빼앗기기 2만여 명이었다.

 

율법과 정신

통일을 염원하는 인사들이 공개·비공개리에 북한을 방문하는 일이 벌써 법정의 차원을 떠난 지 오래다. 지난 한 해만 하더라도 박철언, 정주영씨가 이 법을 위반했을 적에 정부는 그것이 정부의 초법률적 ‘통치행위’라고 변명하였다. 외국 시민권을 가진 이들은 거리낌 없이 평양을 드나들었다. 그렇다면 국민 중에 자기도 그러한 초법률적 처신을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함이 무리가 아닐 것이다.

 

물론 양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문익환 목사나 서경원 의원이나 임수경양은 자기들이 민족적 양심에 따라 행동했지만, ‘실정법을 어겼음을 자인하고’ 벌을 받으러 귀국하고 자수한다는 것이고, 권력의 편에 선 자들은 그 일로 당장 통일을 가져오기나 할 것처럼 매스컴에 올랐다는 점이다.

 

서경원 의원이 교우이고 수십 년간 교회 안팎에서 농민들의 권리를 위하여 투쟁하였음은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된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검찰의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고, 사법부의 판단이 내려지기 전에 “그는 북한 간첩이다!”라고 단언함은 하느님 앞에 형제애를 범하는 죄가 된다.

 

정호경 신부,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성직자들이 서경원 의원을 오래 전부터 알고 신뢰해 왔으며, 추기경께서도 “내가 듣기로는 간첩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으며 나쁜 생각으로 나라를 해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한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공산프락치가 종교계에까지 침투해 있다는 선전에 한사코 매달리는 까닭이 무엇일까? 오랜 세월 함께 일해 온 가톨릭농민회도 “그의 순수한 통일에의 염원을 인정한다”고 공언하지 않았던가? 사법적 차원에서 그는 국회의원 신분으로 안기부에 자진 출두한 사람임을 잊지 말 것이다. 상식으로 보아 자신에게 간첩행위가 숨겨진 사람이면 국외로 탈출하지 자수할 리가 없다.

 

서경원씨 개인의 행위를 굳이 실정법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한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사회참여를 하면서 농민들의 권익을 도모한 그의 모든 활동, 그가 몸 담아 일해 온 가톨릭농민회, 그리고 그가 소속되었던 정당까지 한꺼번에 매도당해서는 안 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 32)는 말씀처럼 우리 교우의 진심과 그 사람에 관한 진실을 끝까지 알아보려는 자세만이 우리에게 신앙인다운 자유를 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