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8일 일요일, 날씨 아주 맑음

 

북한산 봉우리가 유난히 청명해 보이는 하루였다. 오늘은 성지주일(聖枝主日)이다. 개신교에서는 고난주일(苦難主日) 혹은 “종려주일” 곧 팔마나무 주일이라고 부른다. 오전에는 성당에 가서 성지 가지를 흔들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사(受難史)를 듣는 미사에 참석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붙잡혀 고문당하고 처형당하신 과정에서는 인간들의 사악함, 특히 종교지도자들의 악독함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잘 드러난다.

 

오후에는 수유리 송암교회에 가서 그곳 담임목사였던 박승화 목사님의 1주기 추도예배에 참석하였다. 지난번에 이어서 보스코랑 독립운동가들의 묘소가 있는 북한산 “순례길”을 마저 걷고서 오후 4시에 맞추어 예배에 가기로 작정했지만 내가 감기에 걸려 있고 바람도 차고 하여 산행을 포기했다. 4시에 차를 갖고 가서 내 모교인 한신대 캠퍼스에 주차시키고 걸어서 교회에 갔다.

 

내가 한신 69학번인데 그 학번을 전후해서 4~5년 위아래라고 볼 수 있는 선후배들의 얼굴이 꽤 많았다. 박승화 목사님은 2년 선배고 부인 오성애씨는 내 1년 후배여서 동문들이 많은 것 같다. 박승화 목사님 부부는 우리 있을 적에 로마도 다녀갔다.

 "험한 세상 다리 되어" 살아온 박승화 목사

무제-3.jpg

 

박승화 목사는 “사회구원 없이 교회구원 없다!”는 표어를 두고 20여년 송암교회에서 목회를 해 온 사람이다. 오죽이나 그의 사회 목회가 활발하였으면 우리 동네 말남씨마저 그의 교회에 다녔겠는가! 박목사님과 환경운동을 함께 하다가 그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이다. 화계사 스님들과도, 이웃의 수유3동성당과도 친교를 나누면서 지역사회를 위해서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힘을 합쳐 일해 왔었다.

 

박목사님은 학교 다닐 적부터 명랑하고 적극적인 성격이었고 성애는 소리 없는 처녀였다. 둘이 결혼하여 살면서도 목사님은 일중독에 가까워서 부인이 많이 어려웠을 텐데도 언제나 군소리 한 마디 없이 목사 사모의 자리를 지키고 남편을 격려하였다. 박목사는 그렇게 그 어려운 목회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서 세상을 떠났다. 작년에 성묘하러 갔더니 화장하여 수목장을 하고 기다란 비석에 새겨진 숱한 이름들 가운데 하나로만 흔적을 남겼다. 멋있게 살고 멋있게 간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삶을 본따서 살면서 “험한 세상 다리 되어” 이웃을 보살폈고 이제는 자기가 그 다리로 건너가 버린 것이다. Bridge over the troubled water 라는 노래 가사를 박목사가 자기 나름 대로 번역해 불러온 노래를 성가대가 다시 불러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우리 삶의 고달픈 목에서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여기 옮겨 놓는다. 추모예배와 추모음악회에 이어서 박목사님의 설교집이 간행되어 배포되었다. 책 제목도 「험한 세상 다리 되어」였다.

 

                                     험한 세상 다리 되어

 

그대 지치고 곤하여 초라해지고

눈물이 뒤범벅이 될 때에

내가 눈물을 닦아 주리라

험한 세월이 닥쳐 와 친구들마저

다 떠났어도

난 그대 곁에 있으리라                       배를 띄워라 항해를 계속하라

출렁이는 파도 위의 다리처럼               그대를 향한 밝은 날들이

내가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꿈을 가득 싣고 다가오고 있구나

그대를 건너게 하리라.                       보라 저 빛나는 태양을!

                                                  그대를 도울 친구가 필요할 때에

어둠이 밀려오고                              내가 노 저어 데려다 주리라

온몸에 고통이 퍼져갈 때,                   출렁이는 파도위의 다리처럼

나는 그대 편이 되어 주리라                 내가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길거리를 방황하며                            

마음의 상처 깊고

그대의 모든 아픈 기억들을                             

지워주리라.

 

무제-2.jpg 추모예배에는 오랫동안 여선교회 총무를 하신 나선정 장로님도 지팡이에 의지하여 오셨다. 다리를 잘 못 쓰신다. 흰머리의 백인화선생은 오랫동안 근무해온 한신대학 도서관을 떠났단다. 성심여대를 나온 터라서 가톨릭측에도 친구가 많다. 복음성가 가수 윤인선씨도 여전하다. 가끔은 내가 얼굴을 못 알아보는 후배도 보이는데 나와 보스코의 러브스토리만은 익히 들어 알고 있어서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들을 보낸다.

 

박승화 목사의 미망인 오성애를 가운데 두고 윤인선, 전순란, 백인화, 권영숙, 한선희 동문

무제-1.jpg

 

행사후 회식에서 여동문들은 나를 에워싸고서, "백형이 나에게 버림받고서 힘들게 인생을 살아왔고 지금은 더욱 힘들어하는데 마음 아프지 않느냐?"고 묻기도 한다. 이런 질문을 받으려고 어젯밤 꿈에 내가 그를 보았을까? 그가 자꾸 찾아와 나를 괴롭히는데 보스코가 보다 못해서 “이제는 내 아내고 오래 전 일이니 놓아주라.”고 타이르던 꿈이었다. 누군가 "언니, 내가 버린 놈도 있는데 내 생각은 하지도 않고 너무너무 잘 살아. 그거 기분 더럽던데...“라고 맞장구치면서 내 얼굴을 떠보기도 한다.

 

또 누구는 자기 친구가 2년 연하의 동급생과 연애를 했는데 집에서 반대하여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보내던 날, 그 애인이 한 달 휴직을 하고서 찾아왔단다. 신부가 화장하는 곳을 찾아와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로 여자를 안고서 도망가 버렸단다. 영화 「졸업」의 장면 그대로였단다. 그리고 한 달 만에 둘이서 돌아와서는 당당하게 결혼하였단다. 그런데 지금은 둘이서 너무너무 잘 산다면서 “결혼은 역시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에게 필이 콱 꽂혀서 해야 한다.”면서 나를 우회적으로 놀린다.

 

1973년 봄 4월, 한신대 김정준 학장님을 주례로 세우고, 한신대 캠퍼스 채플실에서  올려지기로 청첩장이 돌아간, 4년간 캠퍼스 커플로 소문난 사람들의 결혼식을 망치고 달아나버린 신부! 그것도 가톨릭대학교의 어느 신학생을 따라서.... 그렇게 내 얘기는 수유리 한신대에서 여학생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이 되고 말았나 보다.